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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아이
 
매헌 윤봉길 의사
김다인  onehsp@hanmail.net 2018-02-20 1176



3.1운동을 겪은 후 윤봉길 의사는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지 않겠다며 보통학교를 중퇴하고는 한학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1930년 23살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후 중국의 상해로 간 윤 의사는 공장 노동자, 야채상을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청년이 김구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배추 장사만 하다 갈 수는 없습니다. 뭐 할 일이 없겠습니까?"

김구 선생이 가만히 눈을 보니까 눈이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소원이 뭔가?"

"남자로 한번 태어났으니 큰 일을 한번 하고 싶습니다."

"그러냐."

김구 선생이 잘 관찰해 보고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러이러한 자가 있는데 이 사람을 제거해야 되겠다. 이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있겠느냐?"

말을 듣자마자, 절을 세 번 합니다.

"그렇잖아도 뭘 하고 싶었는데, 내게 삶의 목적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아유, 배추장사만 하다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폭탄을 던지고 같이 죽는 길인데, 이 사람 그냥 신이 난 것입니다. 김구 선생이 말했습니다.

"인물은 숨어 있었구나." 마침 나라를 위한다며 입으로는 별별 소리를 다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차를 타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금이 간 김구 선생의 싸구려 시계를 보고 자기 시계를 풀렀습니다. 나는 조금 있으면 죽을 사람인데, 김구 주석의 시계가 너무 싸구려입니다. 그러니까 시계를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32년 4월 26일 김구의 애국단에 가입한지 사흘만에 홍구공원 의거를 성공시켰습니다. 

 

이 거사로 일본 거류민단장, 상해 파견국 사령관이 사망했고, 일본공사, 제3함대 사령관, 제 9사단장, 상해 총영사, 거류민단 서기장 등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체포된 윤봉길은 상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해 25살의 꽃다운 젊음을 조국에 바쳤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죽으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죽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보고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군사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능히 하니 장하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후 장개석 정보는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활동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때까지 조선일들을 일본의 앞잡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중국인들은 윤봉길 의사의 거사가 있던 날, 거리로 쏟아져 나와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했습니다. 

 

제 정신을 못 지키고 나라를 빼앗긴 암울했던 시대에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 그밖에 이름없이 목숨을 던진 독립운동가들은 깜깜한 밤길에 하나의 외로운 등대불과 같은 역할을 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런 분들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1993년에 임시정부요인 50분의 유해가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 국립묘지에 안치되었습니다. 독립운동에 목숨바친 이 분들의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오기까지 50여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타국땅에서 방치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흔히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못 살고 친일파의 후손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왜 50분의 독립유공자의 유해가 50년이 지난 후에야 고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에 우리의 땅은 광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정신은 진정 광복이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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